The Secret Life of Buildings
Edward Allington (Professor of Slade School of Fine Art)


   All buildings conceal something, sometimes the things we don’t want to see. Buildings are designed to tell lies, we don’t want to see the mechanisms of our houses and our workplaces, and we want to believe that we live in a clean safe world. We don't want to see wires, pipes, drains, extraction systems, the mechanisms that allow us to maintain, our illusions. The surfaces of the rooms we use mask the structures, which support them.

   In England builders have a not very admirable method of cleaning up which is that common, it has become a popular saying, “ sweep it under the floor boards” meaning lets hide it and forget about it. Some times on lifting old floorboards amongst the dirt are odd objects, or even newspapers that reveal the date those boards where last raised, some times worse things are found the bodies of animals or occasionally human beings. Murderers sometimes like to keep their victims close to them. Building move and change, most are broken in some way, or at least modified. Some parts of them are functional some are not buildings are in their way deceitful. What if we to imagine a form of archeology which was upside down? Archeologists dig into the earth, excavating, measuring, finding fragments, and sometimes whole objects intact, objects which have been hidden for centuries, millennia even, but would we expect to find whole objects buried in buildings? I think not there would be no reason for them to be there. Yet this what we find in the work of Shan Hur.  

   We enter a building or a gallery seemingly as we saw it before or as we expect it to be as it was before, it is not, and where is the work of Shan Hur, which we have come to see? It would seem its not there either, and then we seem to see that part of the fabric of the building has been chiseled away. Excavated, perhaps there is some building work that has not been completed? A repair that needs to be completed, but no there revealed and unmarked is a saxophone, or a perfect Chinese vase. Various questions arise firstly why is this object preserved in the fabric of the building? And how did who ever started to chisel it out so carefully know it was there? Why didn’t they damage it during the process? Do the other columns, walls also contain similar objects is there some form of hidden buried museum of objects in the room? It is a disturbing thought.  

   The beauty of Shan Hur’s work is that is that everything is not as it seems. He has carefully added something to the building in a way that is discrete and coherent with its structure. The thought process we find ourselves going through as if like archeologists we have discovered something new and intact, is in fact the reverse. It has not been excavated but sculpted. However what the work of Shan Hur does do is make us question the world around us and what is hidden within it. After seeing his work trusting the structures we live in and take for granted is not as easy as it once was.

허산의 설치,
그 '위장된 실제성’
전영백 (홍익대학교
예술학과/미술사학 교수)


   허산은 1980년 태어났다. 서울대 조소과와 Slade School of Fine Art 대학원 미술과를 졸업했다. 국내를 비롯 영국과 독일에서 7회의 개인전을 열었다. 또한 국내외 다수의 기획전과 그룹전에 출품했다. ‘영국 왕립조각가 소사이어티 신진작가상’(2013), ‘The Open West’ 대상(2011), ‘브라이튼대 미술상’(2007) 등을 수상했다. 현재 영은미술관 레지던시 입주작가다.

   허산의 작업을 처음 본 것은 9년 전이었다. 그 때 그의 설치는 런던의 《4482》(영국과 한국의 국제 전화번호를 조합해 만든 기발한 명칭의 재영 한국의 젊은 작가 단체전시 조직이다. 전시는 2007년에 시작됐고, 2008년 이후부터는 런던의 옥소 건물(OXO tower, Barge House)에서 개최되고 있다. 필자는 2010년 개최된 《4482》 전시를 보았다) 기획전에 포함되었는데, 흰 기둥의 중간 부분을 파손시킨 작품이었다. 그리고 2011년 런던 한미갤러리 개인전 《Situated Senses》에서 목격한 그의 공간설치 <경사각(inclined Angles)>은 더욱 황당하고 당돌한 작업이었다. 짐짓 공사 중인 듯, 갤러리의 2층과 3층을 ‘망가뜨리고’ 변형시킨 공간 작업에서 받은 언캐니(uncanny)한 느낌을 지금도 기억한다. 빈 방의 마룻바닥을 약간 기울어뜨리고 그 공사의 자취를 거칠게 드러낸 게 전부였다. 그야말로 전시란 사실을 알고 들어가지 않은 사람은 영락없이 공사 중으로 착각하고 나올 상황이었다. 기울어진 바닥의 ‘이상한’ 공간에서 관람자들은 미심쩍은 눈으로 전시공간을 이리저리 탐색했다.

건축 구조에의 조각적 개입


   허산은 런던의 슬레이드(Slade School of Fine Art) 대학원 시절인 2008년부터 기둥작업을 시작했다. 그의 대표작은 대부분 건축의 기둥 일부를 파괴, 변형시키거나 마감된 벽면에 강한 충격을 주어 오브제를 끼우는 등, 기존 건축에 개입하는 방식을 취해왔다. 이러한 작업은 관람자의 공간 지각과 건축적 구조에 대한 관습적 인식을 흔들어대고, 긴장과 불안을 초래한다. 이는 고든 마타 - 클락(Gordon Matta-Clark)의 <반건축(Anarchitecture)> 작업과 공유되는 점이다. 그러나 마타 - 클락이 사용하지 않는 건축 전체를 자르거나 전면적인 구멍을 뚫은 것과 달리, 허산의 작업은 실제 사용하는 건축의 구조에 부분적으로 개입하여 무정형으로 파괴한다. 그의 작업은 한 마디로, 건축 구조에의 조각적 개입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허산의 기둥 작업들은 대부분 ‘눈속임(trompe-l'oeil)’을 특징으로 한다. 그는 일상의 건축 내부에 ‘짝퉁 기둥’을 끼워 넣고 여기에 변형을 가해 관람자에게 시각의 혼란을 초래한다. 2008년의 첫 기둥 작업 <부서진 기둥 Broken Pillar #01>으로부터 런던 가젤리 아트하우스 내부의 <매듭진 기둥(Knotted Pillar)>(2013)에서 보듯, 작가가 새로 제작한 기둥은 건축 내부에서 기존의 기둥들과 다름없어 보인다. 그는 이처럼 기둥의 구조를 부분적으로 파괴 혹은 변형시켰을 뿐 아니라, 기둥의 한 중간에 엉뚱한 오브제를 박아둔다. <기둥의 공 Ball in the pillar>(2011), <잊혀진 no.2(Forgotten no.2)>(2010), 그리고 <행운의 동전(Lucky Coins)>(2010) 등에서 보는 기둥이나 벽에 박힌 오브제들 –농구공, 도자기, 동전 등–은 허구의 내러티브를 위한 구체적 물증인 셈이다. 일종의 고고학적 발굴 작업을 연상시키는데, 특정한 지점과 연관된 역사적 출토나 사건의 전말을 위한 결정적 단서를 제공하는 듯하다. 이렇듯 작가의 연출된 미장센은 허구지만 실제성을 도용한다.


연출된 미장센, 그 ‘위장의 실제성’

   허산의 미적 전략은 결정적인 최소한의 작용으로 개입하여 크게 흔드는 방식이다. 언어에 비유하자면, 결정적 순간에 발설하는 한두 마디가 큰 파장을 일으킬 상황을 만든다. 그의 공간작업은 많이 건드리지 않고 최소한으로 개입해 관람자에게 전체 구조의 위험을 느끼게 한다. 기둥을 변형시킨 작업들을 볼 때, 우리는 기둥이라는 구조의 근본적 역할을 환기시켜 그것의 균열과 파괴가 가져올 엄청난 결과를 상상한다. 그리고 이에 따른 위험을 몸으로 상상 체험하게 하여, 불안심리를 조장한다. 언캐니는 그의 작업에 적합한 용어다. 관람자의 긴장감과 불안은 익숙한 일상의 공간을 낯선 상황으로 느끼게 한다. 이러한 심리적 동요는 작가가 만든 허구적 사건의 도발로 인한 것이다. 앞뒤 없이 뜬금없는 픽션을 만들어놓고 관람자의 상상에 작용한다.

   기존에 있는 기둥과 똑같은 것을 만들어 위험한 균열을 내거나 부분적으로 깨부수는 그의 <부서진 기둥> 연작, 빈 방의 바닥을 기울여 경사진 각도를 만든 <경사각>, 벽에 구멍을 내고 항아리를 박아 마치 발굴 현장처럼 만들어놓은 <잊혀진 no.2> 등에서 작가는 허구적 사건을 실제인 양 가장(masquerade)한다. 건축 구조와 공간에 직접 개입하는 그의 ‘픽션’은 관람자의 지각에서 ‘실제(논픽션)’로 인식된다.

   이렇듯 상상력과 호기심을 유발하는 허산의 작업에서 필자가 주목하는 것은 ‘위장(僞裝)’이 불러오는 실제성이다. 있는 것을 없는 것처럼 감추기도 어렵지만, 이보다 어려운 게 그 반대다. ‘시뮬라크르(simulacre)’의 특징이 그러한 건데, 허산의 작업에서 그 논리를 본다. 그는 건물의 구조 및 공간에의 파괴적 개입을 통해 우리의 지각을 교란시킨다. 그리고 그렇게 위장된 실제는 그 상황이 환영이나 간접적 표현이 아니라, 직접적이고 물리적이기에 지각을 교란시키는 데 매우 효과적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허구는 진정성을 갖는다.

   허산의 작업은 언젠가 필자가 ‘조각 같지 않은 조각’이라고 명명했지만, 공간을 점유하는 조각이 아닌 공간에 섞여 들어가는 조각적 행위라 할 수 있다. 작품이 독자적으로 두드러지거나 스스로의 실체를 주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건물의 구조에 관여하고 환경이나 공간에 개입하는 그의 작업은 우리로 하여금 일상에 대한 습관적 지각을 재고하게 만든다. 그런 그의 작업이 최근 변화를 보이고 있다. 지난 12월 초까지 가나아트센터 한남에서 열린 《일상의 특이점들》(2018.11.8~2018.12.2)은 그의 대표작인 기둥 작업과 함께 브론즈로 제작한 일상의 오브제들을 선보였다. 물리학에서 상태가 급격히 변이하는 변곡점인 ‘특이점’이란 개념을 통해, 작가는 오브제의 물성에 대한 실험을 새롭게 보였다. 그런데 이는 기존 구조를 파괴하거나 공간에 개입하는 ‘네거티브(negative)’ 방식이 아니다. 오브제가 그대로 몸체를 드러내는 독립적인 작품들이 공간에 산발적으로 설치되었다. 그러나 여기에도 눈속임이 지속됨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시각적 위반’에서 기존의 오브제가 가진 물성이 반전된다. 전시에서는 브론즈로 제작된 오브제들이 구겨진 종이컵과 테이프, 그리고 꽃과 못으로 ‘특이하게’ 위장되어 배치돼 있었다. 아마도, 허산의 시각적 위반은 앞으로 보다 조각적인 외양으로 진행될 모양이다.

이음새가 보이지 않는
진짜와 가짜의 패치워크
공간 조각
신보슬 (토탈미술관)


    너무 일찍 도착했다. 문이 열리지는 않았지만, 한 눈에 전시장을 들여다 볼 수 있다. 전시장 가운데 기둥이 있고, 맞은편 벽에는 청 테이프가 붙어있다. 어? 어떻게 청 테이프가 떨어지지 않고 붙어있지? 그리고 보니 왼편에는 검은 색 마스크가, 오른편 벽면에는 하얀 봉지에 묘목처럼 작은 나무 같은 녀석이 담겨져 걸려 있다. 저쪽 좌대위에는 컬러풀한 종이컵 세 개가 포개져서 쌓여 있다. 공간의 특성상 들어가지 않아도 다 볼 수 있었지만, 왠지 가까이 들어가 보고 싶어진다. (<일상의 특이점들> 전시장에서, 2018)

   가나 아트 한남에서 열린 허산의 개인전 <일상의 특이점들>는 작가 개인에게 있어 이행적 전시-기둥 시리즈에서 다음 작품으로의 이행-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런던 유학시절부터 트레이드 마크가 되었던 ‘기둥 시리즈’는 작가 허산을 사람들에게 인지시키는 아주 중요한 작품이면서도 동시에 그 시각적인 임펙트가 너무 강하여 그로부터의 탈피가 쉽지 않은 과제였다. 작가 역시 그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그 이행이 자연스럽게 이어질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 실제 기둥 같은 ‘가짜’의 기둥을 만들어 전시 공간에 ‘접합’시킨 후에 다시 그 한 귀퉁이를 부수고 그 안에 마치 보물찾기라도 하듯 오브제들을 숨겨놓았다. 이처럼 이미 관객에게 익숙한 기둥시리즈와 함께 브론즈로 제작한 일상의 오브제들을 배치해 놓았다. 공간읽기에 능한 작가의 치밀한 계획에 따라 설치된 기둥과 오브제 사이에서 관객은 잠시 멈칫한다. 어디까지가 진짜 공간이고, 어디부터가 작가의 계획인 것인지 구분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게 언뜻 전혀 달라진 작품처럼 보이지만 <일상의 특이점들>에 전시된 작품들 여전히 진짜와 가짜. 실재와 허구. 일상과 예술의 경계의 지점에 서 있다. 물리학 용어에서 가져온 ‘특이점’은 일종의 변곡점으로 상태가 기하급수적으로 변화하는 지점을 뜻한다고 한다. 아마도 작가는 전시장 가운데 있는 (가짜) 부서진 기둥과 부서진 기둥의 잔해물인 듯 추정되는 부서진 자재들을 시작으로 마스킹 테이브, 마스크, 못, 비닐봉투와 나무, 청 테이프로 대충 벽에 붙여 놓은 듯한 정체모를 오브제들을 통해서 관객이 일상에 잠시 쉼표를 취하기를 바랬던 것 같다.

   물론 일상과 예술의 경계 허물기라는 그의 목표는 갤러리라는 공간이 가지고 있는 견고한 의미로 인해 도달하기 쉽지 않아 보인다. 전시장에 들어온 관객은 이미 공간 안에 있는 오브제들이 작품임을 인지한다. 그리고 실제보다 더 실제 같은 비닐봉지 않아 담겨진 브론즈 식물은 한눈에 진짜가 아님이 들통난다. 너무나 진짜 같지만 어색하게 걸려 있는 마스크, 떨어져야 마땅한데 떨어지지 않고 벽에 꼭 붙어 있는 마스킹 테이프. 구겨져서 주저앉아야 하지만 여전히 간격을 잘 유지한 채 좌대위에 포개진 종이컵. 세심하게 살펴보면, 이 모든 것들은 이미 스스로 (갤러리 공간 안에서) ‘예술 작품임’을 주장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어색어색한’ 모든 것들이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지점. 그 지점이 바로 허산이 말한 상태가 변이되는 변곡점인 ‘특이점’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 특이점을 위해 교묘하게 덧붙여진 공간 때문에, 관객은 어디에서 어디까지가 실제로 작품인가를 알 수 없다. 늘 그렇듯, 허산의 공간은 한 번에 읽히지 않는다. 전시장에 들어서는 순간 그가 만든 이미지의 공간인 듯도 보이고, 이미지의 공간 안에서 또 다른 진짜와 가짜들이 엮여 있다. 가깝게 다가갔다가 뒤로 물러났다가 진짜와 가짜 사이에서 조금은 방황하면서 조금씩 공간을 읽어갈 수 있다.

   어느 인터뷰에서 크리스 버든은 조각의 매력은 회화와 달리 관객이 사방을 둘러볼 수 있는 점, 때문에 자연스럽게 관객의 움직임을 유발하는 점이라고 했는데, 버든의 조각에 대한 이야기를 받아 이어가자면, 허산은 개별 조각 작품들을 잘 조합, 배치하여 조각을 만드는 동시에 공간을 조각하고 있는 모른다. 그래서 매 전시가 장소 특정적이고, 공간에 조응한다. 때문에 그의 전시는 어쩌면 눈으로 읽는 것이 아닌 몸으로 반응해야 하는 전시이다. 여기에서 흥미로운 지점은 관객이 조각 안(전시공간)에 있으면서 조각 작품들을 밖에서 바라보는 일종의 뫼비우스의 띠처럼 안과밖에 이어지는 경험이다. 

인식의 관성을 부정하다
황석권 / 월간미술 편집장


   세상의 모든 상황이 아무렇지 않게 돌아가는 것처럼 믿게 되는 이유를 생각해보면 익숙하기 때문일 것이다. 별의별 일이 하루에도 수없이 일어나고 있지만 당사자가 아니고서는 그것은 남의 이야기일 뿐이다. 이 말을 좀 달리 표현하자면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에도 익숙한 일이 벌어져야 하며 익숙한 사물은 그곳에 있어야 한다는 일종의 견고한 고집에 길들여진 우리 모습의 한 단면이 아닐까 한다.

   허산이 제시하는 작업은 그 익숙함을 깬, 그래서 여러모로 관객을 불편하게 만드는 장치로 가득하다. 기본적으로 허산의 작업은 앞서 말한 관객의 평안을 추구하려는 욕망에 찬물을 끼얹는 행위로 보인다. 일찍이 로트레아몽이 말한 “수술대 위의 우산과 재봉틀의 우연한 만남”이라는 글귀의 내용처럼 허산의 작업은 관객으로 하여금 익숙함이라는 믿음의 근간을 흔드는 묘한 힘을 갖고 있다. 낯섦을 예상치 못하고 맞닥뜨렸을 때 느끼는 당혹감은 사실 수용하기 힘든 것이기 때문이다.  
작가는 면밀한 관찰을 통해 ‘익숙한 상황’의 조건을 잘 알고 있었다. 이에 대한 증거는 허산 작가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전해 들을 수 있었다. 유학 시절 매일 드나들었던 학교 전시장의 벽을 막아 사다리를 세우고 마치 그곳에 벽이 있었던 것처럼 작업을 설치하니 모든 이들은 당황스러움을 느끼더라는 것. 심지어 교수부터 그곳의 경비원까지 말이다. (2009)와 (2008)이 바로 그 작업이다. 이렇듯 사람의 고정된 인식은 쉽게 변하지 않으며 우스꽝스러운 상황을 자아내기도 한다. 바로 이 지점을 허산은 파고든 것이다.

   이쯤에서 허산의 작업을 크게 두 가지 카테고리로 나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공간을 지배하는 주체에 대한 문제, 그리고 또 하나는 제시되는 상황의 문제다. 
허산 작가의 작업이 주는 효과는 익숙한 공간에 들어가는 일상적 행위에 대한 의구심을 들게 한다는 점에서 인식의 균열을 야기한다고 본다. 이러한 인식의 균열은 관객이 스스로 규정한 상황과 익숙한 공간에서 발생하는 것이기에 적지 않은 파동을 일으킨다. 이를 위해 작가는 스스로 ‘새로운 공간을 구축’한다. 새로운 공간의 구축은 다시 새로운 상황을 제시하고 있을 법한 ‘무엇’을 설치하면서 이뤄진다. 그런데 여기서 ‘새로운’이라는 수식어를 매우 민망하게 만들 만큼 그 재현은 매우 사실적이다. 그 공간에 언제나 존재했던 기둥과 그것을 본뜬 가짜(fake) 기둥을 ‘있어야 할 그곳’에 세우고 그것이 마치 파손된 것처럼 제시한다. 굳건히 서있어야 할 기둥의 균열은 곧 관객에 의해 발견되고 자신이 화이트 큐브에 있다는 현실을 잊은 채 불안감에 사로잡히는 그들은 꽤 오랜 시간 벽의 틈과 기둥이 허구라는 것을 알아채지 못한다. 이러한 상황은 벽 틈 사이로 보이는 감춰진 유물을 발견하는 연작에서도 동일한 일어나는 바다. 따라서 허산의 작업은 공간을 장악하는 주체임과 동시에 관객에게 발견되는 대상으로서 기능한다.

   그런데 그 자체로 오브제로 보이는 작업이 조각의 문법 체계를 유지하면서도 그 자체로 새로운 공간을 만들어내는 이유는 바로 ‘개념’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개념의 조형화라는 뼈대에 살을 붙이는 과정은 그것에 가공의 역사를 덧대는 방법으로 이뤄진다. 관객은 벽 틈새에서 발견하는 비역사적 유물들에 의해 존재하지 않았던 가공의 역사를 상상하고 그렇게 생성된 가공의 역사를 통해 역설적으로 이면의 감춰진, 오로지 상상에만 존재하는 역사를 추정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 그렇게 보면 허산은 개념의 조형화에 매우 익숙하게 대응하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 인식의 과정은 현실과 매우 높은 개연성을 갖게 된다. 이는 어떻게 보면 고고학적 관점에 기인한다고 보이는데 고고학도 발굴을 할 때, 각종 레퍼런스를 참조하여 가장 가능성이 높은 곳을 지정하는 귀납적 방법을 채택하기 때문이다. 그런 과정에 의해 비역사적 유물은 마치 그곳에 존재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는 당위성을 획득하게 된다. 허구가 허구를 낳는 순환 고리는 이렇게 탄생된다.

   앞서 언급했지만 허산의 이러한 작업이 더욱 공고한 허구성을 획득하기 위한 기초 작업은 그것의 충실한 재현뿐만 아니라 관찰이다. 관람객의 동선은 물론이고 가공의 설치물 앞에 선 그들의 시선까지 고려해 아주 고약한 속임수를 고안해내는 것이다. 그렇다면 상황이라는 측면에서 작가는 관객을 단순한 작품의 ‘발견자’에서 연극의 무대로 끌어들이는 일종의 연출가의 역할을 하게 된다. 관객은 자신을 매우 익숙하나 낯선 공간에 위치시킴과 동시에 작가가 구축한 무대공간에 서게 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이른바 ‘언캐니(uncanny)’한 공간에 입장해 방향을 상실하게 되니 당연히 불안함을 느끼게 된다. 불안함의 증거는 작품에 대한 응시와 두드림, 그리고 주변을 살피는 등의 행위로 드러난다. 모든 것이 무대의 장치와 같다는 확신을 하고 조작된 공간에서 자신이 속았다는 것을 알아챈 순간, 관객은 안도감과 함께 작가가 제시한 수수께끼의 정답을 구했다는 자부심을 갖게 된다. 이 모든 과정이 바로 ‘미적 체험’이라는 것은 금방 잊은 채. 그래서 허산의 작업은 관객의 불안에 찬 행위가 덧대져야 완성되는 것이다. 이는 일종의 환영이나 허구의 세계로 갔다가 다시 현실을 직시하는 과정에 다름 아니다.

   허산의 작업은 공간과 대상이 동시에 관객을 만나는 과정이다. 관객의 능동적인 개입 없이 이뤄질 수 없는 그의 작업이 망막과 동시에 인식 체계를 겨냥하고 있는 이유를 살펴봤다. 쉽사리 바뀌지 않는 공고한 인식의 체계를 흔드는 방법은 자신을 대상화하는 수밖에 없다. 허산의 말대로 “익숙한 함정”이라는 타성에 젖지 않을 기회를 맞닥뜨리기란 일상에서 그렇게 많지 않음을 우린 너무나 잘 알고 있다. 허산의 작업은 실재와 허구 그 둘 사이의 긴장감을 유지할 것을 관객에게 제안하고 있다.

허산의 ‘비조각적 조각'
작품인가 아닌가,
이것이 문제로소이다.
전영백 (홍익대학교 예술학과/미술사학 교수)


들어가며

   
아방가르드 미술은 늘 기존의 틀을 깨려한다. 모던 아트만 보더라도, 눈으로 보는 것에 충실히 그려 납작 누드를 그렸던 마네, 빛과 색채의 관계에만 집중해서 형태를 으스러뜨린 인상주의, 그리고 실제 변기를 미술관 좌대에 올려놓은 뒤샹, 바닥에 놓은 캔버스 천에 물감 떨어뜨리기로 추상화를 만든 잭슨 폴록, 그리고 엄청나게 큰 철판을 도심 한 가운데 놓은 리차드 세라 등. 아방가르드라 불리는 이들은 각자의 영역에서 이전의 관습을 벗어났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미술사에 남는 이 작가들은 공통적으로 관찰력이 뛰어나다. 그들은 무엇을 새로 만들까를 고민하기에 앞서, 이제껏 무엇이 만들어져 왔는가를 생각한다. 자기 앞에 지켜온 규율과 체제, 그리고 관습적 일상을 유심히 보는 것이다. 현재까지 의례히 그래 왔던 것, 기존에 늘 지냈던 방식은 창의적 미술가에겐 ‘공공의 적’이다. 

   허산의 작업은 한 마디로, 공간을 점유하는 조각이 아닌 공간에 섞여 들어가는 조각이라 할 수 있다. 기념비적인 조각이 아닌 반(反)기념비적 작업이다. 그는 건물의 구조에 관심을 갖고 이에 개입하는 작업을 한다. 작품이 두드러지지 않고 스스로의 실체가 없다. 실체가 있다 해도 독립된 게 아니라 언제나 건물의 구조에 관여하고 환경이나 공간에 걸친다. 따라서 우리가 일반적으로 ‘조각’이라 부르는 범주에 적합하지 않다. 그의 ‘조각같지 않은 조각’은 우리를 둘러싼 공간, 특히 건물에 대한 일체의 인식을 전환시킨다.

   2011년 런던 한미갤러리에서 열렸던 《Situated Senses》에서 허산의 <경사각 inclined Angles>(2011)을 보고 가졌던 언캐니했던 느낌을 기억한다. 작품은 빈 방의 마루바닥을 약간 기울어뜨린 것이 전부인데, 그 느낌은 불안감과 긴장감과 함께 작품에 대한 기존관념을 파기하게 했다. 기울어지 각도의 바닥은 내 몸을 그 공간에서 움직이게 하고 방의 구조를 탐색하도록 하였다. 일상 삶의 공간에서 얼마나 내가 그 구조를 알고 느끼며 사는가를 되새기게 하는 작업이었다.

   그런데, 조각을 전공한 작가가 왜 기존 건물에 개입하는 작업을 하게 되었을까? 허산이 건축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무척 ‘인간적’이다. 한 인터뷰에서 작가는 그가 갤러리 앞에 한창 진행 중이었던 공사를 보고, 흥미롭게 감상하고 있었더니 공사를 하던 인부들이 나와 비키라고 했다는 에피소드를 얘기했다. 그는 자신이 조각가로서 작품과 비작품을 구별하지 못한 당황스러움을 느낌과 동시에, 건물과 건물의 건축과정, 그리고 그 구조에 개입하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고 회상했다. 솔직한 이 얘기는 웃음을 자아낸다. 작가다운 관찰력과 작가다운 발상의 전환이라 여긴다.

비일상적 계기를 통한 ‘상황의 구축’

   
허산의 작업은 일상의 관습에 묻힌 공간 구조에 대한 감각을 일깨운다. 한 마디로, 작품이라 주장하지 않는 작품인데, 익숙한 공간에 변화를 주어 언캐니한 느낌을 자아낸다. 일상의 삶 속 관습적 인식과 생활의 패턴에 의문 제기하고 전환을 유도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와 연관되는 이론적 개념으로 1960년대 후반 기 드보르(Guy Debord)가 제시한 ‘상황’의 구축을 떠올릴 수 있다.

   드보르를 중심으로 한 상황주의자들은 주체가 개입할 수 있는 자발적 순간들은 일상 곳곳에 산재해 있다고 믿었고, 이를 발휘할 수 있는 ‘상황’이란 개념을 제시했다. 이는 주체의 적극적인 개입의지로 일상의 변화를 가져오는 실천을 유발시키는 개념이다. 드보르는 주체가 개입하는 우연적이고 비일상적 경험이야말로 자본주의적인 일상성을 폭로하는 ‘계기’라고 보았다.  
드보르가 제시한 개념은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과 그 실천적 이데올로기에서 이해할 수 있다. 여기서 정치성을 뺀다면, 허산의 작업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의 작업은 공간과 건축의 구조에 개입하여 주체의 관습적 지각에 영향을 주고 일상의 변화를 초래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는 드보르가 말하는 ‘상황의 구축’이란 개념과 상통하는 점이 있다. 이러한 비일상적, 예술적 계기를 통해 작가가 유도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관람자의 지각에 대한 미적 충격이다. 그러한 지각의 전환은 공간과 건축 구조, 더 나아가 일상성에 대한 균열과 파열을 가져온다고 할 수 있다. 허산은 건축 구조의 물리적 ‘상황’을 조성하여 일상에 대한 인식과 감각의 변화를 꾀하는 것이다. 

공간적 사건을 통한 상상의 내러티브

  허산의 언어, 혹은 미적 전략이라면 적게 말하고 크게 상상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의 작업은 많이 건드리지 않고 최소한의 개입으로 우리에게 전체 구조를 느끼게 한다. 그런 점에서 경제적이다. 관람자가 적극적인 개입은 상상력의 발동인데, 우선 기존 구조에 대한 인식에서 시작, 그것에 대한 의문과 숨겨진 것에 대한 종잡을 수 없는 상상으로 진행된다. 예컨대, <부숴진 기둥 Broken Pillar>(2011)을 볼 때, 우리는 기둥이란 구조의 역할을 새삼 느끼고, 작가가 일으킨 약간의 변화가 초래할지 모를 엄청난 결과를 상상한다. 이에 대한 관람자의 심리는 언캐니(uncanny)와 불안, 또 긴장으로 채워진다. 이러한 심리적 동요는 작가가 만든 위험스런 ‘사건’에 대한 상상으로 이어진다. 앞뒤없이 뜬금없는 사건을 일으켜놓고 관람자로 상상하게 만드는 셈이다. 그 결과, 사건이 일어난 공간은 더 이상 지금 여기서 보는 것처럼 아무것도 없는 공간이 아니다. 즉, 과거의 사연과 미래의 변화를 초래할 내러티브 공간으로 전환된 것이다. 이는 허산의 공간 작업이 시간과의 연계를 불러오는 대목이다.

   여기에 덧붙여, 그의 <기둥의 공 Ball in the pillar>(2011), <잊혀진 no.2 Forgotten no.2 >(2010), 그리고 <행운의 동전 Lucky Coins>(2010) 등에서 보는 벽이나 기둥에 박힌 오브제 – 농구공, 도자기, 동전 등 – 는 내러티브의 플롯을 위한 구체적 증거로 제공된다. 고고학의 발굴 작업처럼 그 지점에 연관된 역사적 스토리, 혹은 탐정소설에서 읽는 개인적 사연을 연상케 한다.

가장과 환영: ‘고안된 우연’

   
이렇듯 상상력과 호기심을 유발하게 하는 허산의 작업에 대해 새로운 의미의 ‘가장(masqurade)’과 ‘환영(illusion)’을 활용한다고 말할 수 있다. 있는 것을 없는 것처럼 감추기도 어렵지만, 이보다 어려운 게 그 반대다. 이와 관련하여 예술의 의미에 대해, 특히 회화의 정수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 라캉(Jacques Lacan)은 제욱시스(Zeuxis)와 파라시오스(Parrhasios)의 고전 우화를 소개한 바 있다. 새가 날아와 앉으려다 부딪혀 떨어지도록 나무를 똑같이 모사한 제욱시스보다, 걷어 올릴 수 없는 커튼을 그린 파라시오스가 예술의 진의를 꿰뚫고 있다는 내용이다. 우화를 통해 라캉이 말하고자 한 것은 회화의 핵심은 그것이 그려진 이미지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는 것이란 점이다. 다시 말해, ‘눈속임(trompe-l’œil)’에 속아 넘어가는 게 아니라 눈속임을 인식하고 향유하는 게 진정한 예술이란 것이다.

   위의 우화는 회화를 넘어 조각을 포함한 예술 일반에 관한 것이다. 허산이 건물의 구조와 연관된 조각을 통해 가장과 환영을 다루는 것도 이러한 예술의 근본 테제에서 멀어 보이지 않는다. 기존에 있는 기둥과 똑같은 것을 만들어 균열을 내거나 부수는 그의 <부숴진 기둥>, 빈 방의 바닥을 기울여 경사진 각도를 만든 <경사각>, 벽에 구멍을 내고 항아리를 박아 마치 발굴 현장처럼 만들어놓은 <잊혀진 no.2> 등을 볼 때, 이러한 가장과 환영의 방식을 포착할 수 있다.
여기에 덧붙이자면, 조각만이 가능한 지극히 물리적 상황을 연출하여 추상적 개념을 유도한다는 점이다. 즉 그의 작업은 기둥과 벽 등 건물의 구조, 그리고 부숴진 돌가루와 흩어진 오브제의 파편 등 재료의 물리적 속성을 다룬다. 그런데 작업은 여기서 그치는 게 아니라 개념과 상상을 부른다. 환영과 상상의 힘을 통해, 리얼리티에 대해 갖는 우리의 상식에 의문을 제기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일어나는 것은 실제임을 가장한 사건의 현장에 인해서다. 지극히 평범한 일상의 풍경에서 심상치 않은 사건을 위장하는 것이 그의 작업이다.

   이런 방식은 일종의 ‘고안된 우연’이라 할 수 있다. 허산의 작업은 작가가 모든 것을 통제하여 처음에 계획했던 대로 나오게 하는 방식이 아니다. 예상치 못한 결과가 나오는 것을 반긴다. 최대한 우연처럼 보이게 하려 미리 계산하고 만든다. 계획과 통제를 벗어나는 삶의 임의적 방식과 닮아 있다.

부서진 게 아름답다?

오늘날의 미술에서 아름다움의 기준이 있을 수 없다. 미술의 임무란 차라리 그 기준이 가진 관습과 타성을 직시하게 하고, 기존 인식의 한계를 파고드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를 실행하는 작가들은 인식의 범위를 확장하여 이제껏 알지 못한 아름다움을 제시하곤 한다. 그런데 종종 이 새로운 아름다움에 대해 사람들은 오히려 추한 감정을 갖기도 한다. 이상하고 낯선 것이 미의 영역으로 들어오면서 미와 추의 명확한 구분이란 게 얼마나 인습적인가를 실감한다.  
허산이 조각가로서 미에 대해 제시한 새로운 점은 부서진 것이 아름다울 수 있다는 거다. 그는 완벽히 깨끗하고 우아한 화이트 큐브의 공간을 아름답게 보지 않고, 반대로 적막하고 숨 막히는 공간으로 보았다. 그래서 그는 의도적으로 여기에 잡음을 일으키고 흐트러뜨린다. 완벽한 이성에 대한 인간적 흔적을 만든다고나 할까. 이런 행동은 그의 말을 빌리자면, “적막 속의 울림”이고 “숨 막히는 공간에 숨을 뚫는” 작업이다.

“찾기 전에는 보이지 않는 작품”

   허산은 관람자를 탐정으로 만든다. 그의 전시를 보는 일은 그의 ‘조각같지 않은 조각’을 찾아내는 일이다. 그는 명백한 것을 꺼리는 작가이다. 예컨대, 그의 <경사각>이나 <벽의 균열Crack on the wall>(2013)도 예민하게 느끼고 찾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작품들이다. “찾기 전에는 보이지 않는 작품”이라는 작가의 말은 그의 의도를 잘 드러낸다. 그의 작품을 알아보기 힘든 이유는 그것이 조각 자체보다 조각을 둘러싼 공간과 주변환경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물질적인 것을 이용하면서도 공간을 비우는 작품”이라 강조했다.

   허산의 작업은 몸의 움직임이 개입되는 작업, 몸의 물리적 반응을 유발한다. 그는 관람자들의 “물리적인 반응”을 기대하면서 그들의 몸을 움직이게 한다. 일종의 ‘참여관찰’처럼 작가는 작업의 상황을 만들어두고 관람자를 관찰한다. 기울어진 경사를 알아보기까지 방을 이리저리 걷게 하고, 아래 벽에 박힌 항아리를 자세히 탐색하기 위해 허리를 구부리고 자세히 들여다보게 한다.

   조각이란 매체는 몸을 직접 움직이고 개입하는 점이 특징이다. 오늘날 뇌만 지나치게 발달하는 현대인이 결여하는 점이기도 하다. 허산의 작업은 몸을 회복하고 특히 몸을 움직이는 주체의 주권을 복권하려는 의도를 갖는다. 이런 점에서 보면, 그의 조각같지 않은 조각은 도리어 조각에 충실한 작업이 아닌가 싶다. 그래서 허산의 작품은 조각과 비(非)조각 사이 어딘가 위치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우리로 하여금 이것이 작품인가 아닌가에 의문을 품게 한다. 이것이 그의 조각을 창의적이라 여기는 이유다.

파괴된 흔적이 자아내는
감정의 파문
황정인(미팅룸 대표)


   텅 빈 공간을 들어서니 금이 가서 금방이라도 기울어 무너져버릴 것만 같은 기둥과 강한 충격으로 움푹 파인 벽면이 눈에 들어온다. 과거에 어떤 사건이 일어난 것만 같은 현장. 바로 작가 허산이 만들어낸 위장된 상황 속에 우리는 발을 들여놓은 것이다. 허산은 철저하게 작가의 계산에 의해 구축된 가상의 조형물을 통해, 일상 속의 반전, 침묵 속의 소음, 평정 속의 긴장, 정체 속의 변화, 익숙함 속의 낯설음이 공존, 충돌하는 상황을 만들어 낸다. 부서진 잔해, 금이 간 기둥과 같이 불완전하고 파괴적인 형태의 조형적 요소들은 완벽하고 깔끔하게 마감된 형태들로 가득한 지극히 평범한 일상의 공간에 불편한 분위기를 자아내면서, 별다른 의미 없이 텅 비어있던 공간을 단숨에 의문과 호기심으로 가득한 서술적 공간으로 탈바꿈 시킨다. 이때 상처없이 깨끗한 피부 위에 남겨진 작은 흉터처럼, 작가가 만들어 내는 공간의 상흔은 보는 이로 하여금 과거에 그 자리를 스쳐지나갔을 법한 사실적 정황을 유추하게끔 만드는 지표적 기호(indexical sign)가 된다. 그리고 이러한 공간의 지표적 상흔들을 토대로 한 작가의 작업은 설치형태에 따라 크게 시리즈와 시리즈로 발전한다.

   그의 대표작이기도 한 시리즈는 페인트로 깔끔하게 마감되어 있는 벽면이 정체모를 강한 충격으로 인해 무너져 내리고, 그 자리에서 전혀 예상치 못한 오브제들이 모습을 드러내도록 구성한 설치 작업이다. 무너져 내린 벽채 안쪽에는 청화백자, 금관악기, 동전, 농구공 등 고고학적 발굴, 역사적 혹은 우연적 사건 등의 다양한 해석을 유발하는 기물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하지만 흥미롭게도 이들 오브제가 지닌 공통점은 모두 무너져 내린 벽면이나 그 벽이 속한 공간과의 연관관계가 전혀 없는 사물들이라는 점이다. 때문에 작품을 보는 이들은 각각의 오브제에 대해 갖고 있는 개인적 경험 내지 사회화된 의식을 바탕으로 자연스럽게 작품에 의미를 부여하면서, 무너져 내린 벽의 원인관계나 역사적 의미에 관해 저마다의 다양한 해석을 내놓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작가의 작업에서는 부서진 벽과 그로 인해 남겨진 잔해가 공간 자체에 부여하는 긴장감, 그리고 그것이 발견되는 상황이 작품 전체의 주제에 보다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설치미술 특유의 장소-특정성(site-specificity)의 측면이 작가의 조형적 요소에 핵심적인 요소로 작용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같은 맥락에서 시리즈의 경우, 기존의 공간에 대한 철저한 연구와 탐색이 뒷받침되어 만들어진 공간설치작업으로서 작가의 주제의식이 가장 강하게 드러나는 작업이기도 하다. 기존에 수평적으로 존재하는 공간에 수직적 긴장감을 유발하는 가상의 기둥을 만들고, 그 중 일부를 부서지기 일보직전의 상황 속에 위치시켜 보는 이로 하여금 긴장의 강도를 극대화시킨 작업이다.

   두 작업에서 주목할 점은 작업자체가 지닌 조형성을 포괄하면서 공간 전체를 점유하고 있는 상황설정이다. 작가는 공사현장의 파괴된 흔적들을 모티프로 한 작업들을 통해 일상의 평범함 속에서 가려진 특수성, 완전함 속에 감춰진 불완전함, 정체와 변화와 같이 상충되는 개념들이 공존하는 상황을 효과적으로 드러낸다. 그렇기 때문에 파괴와 변화의 흔적들을 담고 있는 유형의 조형작업보다, 그것이 위치함으로 인해 공간에서 무형의 개념들이 상충하며 빚어내는 긴장감 자체가 하나의 작품으로 기능하는 것이다. 특히 자연스러운 동선이동에 따라 눈에 잘 띄지 않는 공간에 숨어있던 작품들이 불현듯 모습을 드러내거나, 기존의 공간에 이미 존재했던 것처럼 감쪽같이 위장된 오브제들은 이러한 상황설정에서 느껴질 수 있는 감각적 충격을 더욱 극대화하는 요소로 자리한다. 이처럼 파괴의 흔적들이 남긴 공간의 상흔들은 완벽하고 완전한 공간에 긴장감을 유발하고, 변화되는 상황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하면서 보는 이의 내면 깊숙이 잠자고 있던 감각들을 하나 둘씩 일깨운다.


The emotional sensation evoked by ruined trace

Jay Jungin Hwang (President of Meetingroom)

 
 As I enter the empty space, my eyes are met with a slanting column that may crumble down at any moment and a wall dented probably by a strong blow. A scene suggestive of something happening in the past; this is the situation of camouflage we have set our foot in. Shan Hur’s works are crafted by thorough calculation. Through the installation artworks, he creates a context which includes contradictions in daily life, noise in silence, strain in serenity, change in stagnation, and strangeness in familiarity. They coexist and collide at the same time. His works such as collapsed ruin and cracked column are put into extremely ordinary space of everyday life which has been flawlessly put together. This unusual combination arouses uneasiness in viewers mind. Thus, this meaningless and empty space is instantly transformed into a narrative room that is filled with questions and curiosity. At this moment, viewers can use the scars artist put in space as indexical signs to analogize circumstantial reality which would have happened there, just like a tiny scratch on smooth fair skin. Depending on the construction types, these artworks are developed into two series: and.

   Firstly, one of his major works, series, is installation artwork where unexpected objects are revealed once the neatly painted wall has been struck down by a strong force. Those objects, which trigger varied interpretations to archeological excavation, historical or accidental events, include blue-white porcelain, a brass, a coin, and even a basketball. However, what they have in common is that they are unrelated to either the collapsed wall or the space the wall belongs to. As a result, each viewer can come up with various explanations on possible cause-and-effect or historical significance of the destroyed wall and grant their own meanings derived from personal experience or socialized consciousness. From this context, tension created by fallen wall and its ruins and the situational factor where they were found, contribute to the overall theme of the work. That is why site-specificity plays such a crucial role in his works. Similarly, series was created through extensive study and observation of existing space and thus strongly represents his intention. A broken pillar is vertically put onto horizontal space. Then the degree of tension has been maximized by making them look like they are going to collapse at any time.

   What we need to pay attention on these two series is the set context that occupies space beyond constructed forms. Hur uses ruins at the construction site as motives to effectively display contradicting concepts such as uniqueness buried in everyday life, imperfection hidden inside perfection, or stagnation and change. Therefore, the artwork plays its role not merely by having disguised objects that are destroyed and transformed, but the contracting concepts appearing in the space and the tense atmosphere altogether. Especially, the sensual impact in these situational settings becomes maximized by the objects that appear from hidden to be spotted by the viewer’s movement. At the same time, they seem to have existed in the given space already. In this way, dimensional scars left by traces of demolition give rise to tension in flawlessly stable space and trigger curiosity about changing conditions and by doing so, they open the viewers’ eyes to dormant senses deep inside the viewers’ inner world. 

When art becomes architecture On works of Shan Hur
Paulina Olszewska
(Independent Curator)


   As an artist, choosing a field of art and architecture is an enormous challenge. That challenge is even greater when it is not about using architectural motifs in art or dealing with architectural forms, but using art to create an architectural space and out of it, creating a completely new, distinct form. It is not an easy task and surely, few artists have sufficient skill to find their own, individual way of working with art and architecture. Doubtless though, Shan Hur belongs to this singular group of artists who have found their own language in working with art and architecture. In his case, although the risk of failure is high, the artist manage to meet this challenge and, more importantly, to succeed.

   I came across the works of Shan Hur in 2011 while working on a proposal for an exhibition whose main subject oscillated around art and architecture. I was immediately impressed by the works of the Korean artist who was based in London. I decided to contact the artist right away and get to know his works better. Since then, each time, I have been amazed by the new projects he has made, by his creativity, originality and enormous artistic sensibility as well as the intelligent ways of dealing with architecture.

   It is difficult to define Shan Hur's artistic practice and to assign it to a particular artistic movement. Shan Hur's work goes far beyond strict architectural and artistic definitions and their limitations. His artistic practice combines many interdisciplinary elements, which are rarely combined and very often don't go together.
As mentioned above, Shan Hur works with two contradictory attitudes: art and architecture. Nevertheless the originality of his installations is based not only on using those antithetical disciplines, but on creating the right oppositions, sometimes even those which might not be chosen.

   It would be a huge simplification to describe Shan Hur as only a sculptor, the definition does not go far enough. Within his architectonical installations he creates not only a material form but, what is more important, another dimension, which changes meaning of the space and the surroundings.

   On the other hand the artist cannot be described as a builder because the space that he calls to life loses its useful character. It becomes the opposite of utilitarian, though seductive aesthetically.

   Within his experiments, Shan Hur has managed to find his own highly original approach to art and architecture. The artist has discovered artistic elements in architecture, using his imagination, creativity, critical approach and rebellion against established rules. He shows distinctly architectural qualities in making art: spacial and logical thinking or experiment with using certain forms, giving elements their aesthetic meaning. The artist furthermore has taken out of each of this discipline certain elements both have in common: confrontation and interactivity with the surroundings and people who find themselves within.

   Shan Hur has decided to use all of these components to create a new, autonomous form of artistic expression. That is why in each installation, the artist balances these qualities and, depending on the situation and given possibilities, reaches for a particular one. He combines them and changes them until he creates a form that is adequate for the conditions and space.

   Shan Hur's installations can be found both in public and in exhibition spaces. Each is characterized by its own conditions. Each has a different specific, different qualities, and possibilities for use. Working within exhibition space is associated with limitation and isolation and accessibility to only a limited, select public. At the same time exhibition space provides another type of reception: more intimate and individual. It also automatically gives an art work status and defines it as valuable, unique and special.

   Unlike in an exhibition space, working in a public space does not mean limitation and isolation. It remains open and is involved in many various dependencies, which even the artist himself cannot predict. It also means the work is available to everybody, but such a situation may also meet with ignorance and unawareness of the art piece.

   It is the artist's enormous intelligence and intuition that suggest the kind of element that should be added to the space. The method used by the artist can be described as an undisturbed disturbance and can be understood as an improvement of the space, which at the same time becomes an integral part of the surrounding. The originality and uniqueness of Shan Hur's works is based on the relation with each to the spacial situation. Every installation has a very individual character, depending on the circumstances and each affects space differently. The artist doesn't rely on the generality of his pieces, so they cannot be simply taken out from the context they were made for and placed in new surroundings.

   The artist plays with the viewer's common sense and rational way of thinking about space and its rules. He seduces the audience and confronts them with many illogical contradictions, which put the recipients in a very uncomfortable situation. When looking on the works of Shan Hur, they seem at first glance to be an integral element of a space. They seem to be primary, there from the very beginning. But somehow, without knowing how, they have transformed. As though they were alive for a short glimpse and could evolve into a different shape. Maybe an unidentified force has influenced them and changed their regular appearance to a unusual form?

   Shan Hur's installations surprise the viewers and play with their rational way of thinking about space and its rules. The mastery of Shan Hur lies on creating an illusion, which ensures that the changes are an integral part of the space. An illusion which runs counter to common sense. An illusion which seduces, because it remains open for many questions and interpretations and offers multiple narrations.

   Shan Hur's installations are also enriched with a hidden mystery. It is not difficult to discover that almost each of the architectonical forms created by the artist contains a discovery as well. It recalls a archeological excavations, discovered in this particular place just by an accident. Inside an installation certain objects are hidden: small coins, vases or pottery. Elements that might be normally found on an archeological site.

   Under any other circumstances they represent traces from cultures and societies which are now extinct. Only with their help we are able to reconstruct or at least imagine how our ancestors might have lived. But once again, the artist doesn't go for a straight interpretation, but confuses the viewers and put them in irrelevant situation. The side looks like exactly as a fresh discovery, dug out just recently, with rubble and dust lying around. But then how come a basketball or musical instruments, objects used nowadays, can be found amidst traces of old times and symbols of culture which don't exist any more? How did they get there? Who hid them? What message about the culture they represented have they brought with them? These and many other questions bring inconsistency and become an occasion for a deeper critical reflection about the condition of our contemporary culture.


   Again the artist uses the tool of illusion, which seduces and questions our common sense of the received reality we live in. What he creates could be defined as archeology of the contemporary, a form which, according to logical ways of thinking, has no right to exist.

   As Shan Hur admits himself, working with a hidden treasure has also a second meaning and relates to the artist's personal experience. Since childhood the artist has worn a scarf over one of his eyes. Each time he looks with this particular eye at a white surface a small black crack appears. As a child he thought of it as a hidden treasure only he could see. When he started to work as an artist, his personal condition changed to become a limitless source of artistic inspiration. Perhaps in this disturbance of world view, an interpretation of Shan Hur's installation could be found? Maybe because of that, the artist is able to create such disturbing architectural installations, which easily blend into the surrounding, as if they were part of our perception.

   Maybe, but not necessarily. The artist himself doesn't insist on one interpretation and doesn't imply a correct one. For him it is more important if his works are open for imagination and trigger curiosity rather than that they can be allocated one particular interpretation.The artist lets recipients find their own way to explain the situation they are confronted with.

   After dealing with the works of Shan Hur, you gain another perspective on world. You start to be more careful and focused while looking at your surroundings. Without a doubt installations by Shan Hur arouse childish curiosity and push us to observe our surroundings more carefully.

   It is difficult to juxtapose Shan Hur's artistic practice with that of other artists and find direct analogies or the same approach toward art and architecture. But what can be found in Shan Hur's works is dedication and progress. The artist continually develops and improves his work within the field he has had selected. With each new project he reaches for new ideas or totally modifies an old one. But he doesn't copy the same pattern. Rather, each of his projects is a new discovery. It has another character and is totally different. This makes us look forward to new works by Shan Hur. What new surprises and treasures will they bring this time?  

건축적 공간에 대한
조각적 개입
Sculptural Interventions into Architectural Space
안소연(미술비평가)
Soyeon Ahn(Art Critc)


   현대미술에서 “공간”에 대한 관심은 수많은 출구를 제시해왔다. 역사적 아방가르드들의 시각적 해방과 형식주의 모더니즘을 지탱해준 ‘거리두기(Alienation)’로부터의 탈출이 그것을 말해준다. 공간에 대한 동시대의 관심은 수직적인 역사적 서사와 수평적인 사회적 맥락들을 넘나들며 일상을 지배하는 여러 장치들에 대해 질문을 갖게 했을 뿐 아니라 그것을 대체할 새로운 형식들을 이끌어냈다. 그런 의미에서, 공간-장소-제도로 이어지는 일련의 흐름은 “현재”라는 시공간을 탐색하는 동시대의 다양한 실천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가 된다. 그 흐름의 연속에서 볼 때, 작가 허산은 공간에 개입하는 하나의 시각적 모델을 다루고 있다. 그가 특히 주목하는 공간은, 모든 것이 사라지고 없는 어떤 정지된 시간을 담보로 한 비현실적 공간에 가깝다. 끝없이 흘러가는 도시 한복판에서 느닷없이 출몰하는 공사 현장이나 문 닫는 상점은, 작가에게 아주 잠깐 동안이나마 봉인된 상상적 시공간의 체험을 제공한다. 말하자면, 허산의 작업은 도시를 산책하면서 현실과 단절된 공간에 대해 그가 우연히 겪었던 사적인 경험에서 출발한다.

공간의 역설

허산의 (2008)은 부서진 기둥 자체에 대한 관람자의 일방적인 시선을 요구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텅 빈 전시 공간 내부의 건축적 맥락에 따라 임의의 기둥을 세우되, 역설적이게도 그것이 위태롭게 부서진 형태라는 점에서 관람자의 신체적 긴장과 심리적 불안을 유도한다. 천장과 바닥에 마치 존재의 흔적처럼 유일하게 남아있는 기둥의 파편들은 그 불완전한 형태에도 불구하고 공간 전체를 압도한다. 그것은 “장소성”을 상실한 침묵의 텅 빈 공간에 나 있는 미완의 작은 파열 때문이다. 진공상태인 것처럼 완전한 침묵을 이루고 있었을 공간에서 그 균형을 무너뜨리는 작은 파열음은 침착한 공간을 매우 복잡하게 만든다. 그의 작업은 분명 공간을 점거하고 있다. 무슨 일이 일어난/일어날 것인지, 무엇이 사라져버린/나타날 것인지, 우리는 어떻게 해야/하지 말아야 하는지. 낯선 공간에 대한 역설적인 지각 경험은 쉽게 정의되지 못한다. 이는 텅 빈 추상적 공간에 다시 진입하려는 새로운 “장소성”의 개입 때문이다. 관람자가 겪을 시지각적 혼란은 그들로 하여금 그 공간을 끊임없이 사유케 하는 원동력이 된다.

   허산이 영국의 글로스터셔(Gloucestershire) 대학 건물에서 보여준 (2011)은 앞선 연작들과 조금 다른 맥락에 놓여있는데, 텅 빈 공간이 아닌 (2009)처럼 일상의 기능하는 공간에 대한 불편한 침입을 보여준다. 에서, 그는 건물의 현관 지붕을 떠받치고 있는 네 개의 흰 색 기둥에 주목했다. 네 개의 기둥 중 건물 바깥쪽에 있는 기둥 하나에 위태롭게 균열을 낸 작가는, 텅 빈 공간만큼이나 더 이상 주의를 끌지 못하는 일상의 익숙한 형태들에 대한 도발적인 전복을 꾀했다. 일종의 건축적 구조에 대한 그의 반/건축적 제스처는 신체의 경험 및 시지각의 혼란을 넘어서서, 물리적 균열이 함의하는 심리적 충격과 사회적 발언으로 확대된다. 1960-70년대 이후 미술에서 실제 건물과 건축적 재료들을 이용한 반/건축적 흐름을 참고해 볼 때, 허산이 보여주는 건축 공간에 대한 낯선 개입은 실제 공간에 잠복되어 있는 시지각적·심리적·사회적 함의를 들춘다. 단단한 물리적 공간에 저항하는 미세한 균열은 그 공간이 유도하는 익숙한 상황을 단숨에 전복시키고, 오히려 관람자에게 숨겨진 속살-기둥의 단면 및 철골 구조 등-을 폭로하면서 복잡하고 불안정한 내부와 직면케 한다.

   한편 런던의 가젤리 아트 하우스(Gazelli Art House) 내부에 두 개의 기둥을 세워 놓은 (2013)는, 그동안 작가가 연작에서 탐색해온 건축적 공간과 장소성의 문제를 보다 유연하고 위트 있게 다루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갤러리 외벽을 따라 본래 건축적 설계로 만들어진 두 개의 기둥을 갤러리 안으로 끌어들였다. 는 갤러리 내부와 외부를 매개하는 유리벽을 사이에 두고 실제의 기둥 두 개와 복제된 기둥 두 개가 나란히 마주하는 구조다. 허산은 두 개의 가짜 기둥 중 하나에만 극단적인 형태의 차이를 부여했는데, 그것은 느슨하게 매듭지어진 단단한 콘크리트 기둥으로서 마주한 형태들 속에서 시지각의 한계를 노골적으로 가중시킨다. 이는 그가 안정되고 통합된 도시의 풍경 속에서 발견한 불안정한 공간-공사 현장이나 문 닫는 상점-에 대한 체험과 마찬가지로 끝없는 시지각적 충돌로 인한 현실과의 불일치 및 언캐니의 감정을 극대화한다. 요컨대 허산은 일상의 익숙하고 안정된 공간에 대해 자동화된 인식적 틀에 저항하는, 소위 “낯설게 하기(defamiliarization)” 방식으로 세계를 재인식한다.

조각적 개입

   허산이 실제의 건축 공간에 개입하는 방식은 매우 역설적이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그는 건축적 공간에 대한 반/건축적 제스처를 취하면서 궁극적으로는 낯설게 하기 방식에 따른 관람자의 시지각적 혼란과 심리적 갈등을 십분 활용한다. 그의 작업에서 낯설게 하기의 방식은 건축적 공간에 대한 조각적 변형을 통해 보다 적극적으로 이루어진다. 그의 일련의 작업들을 보면, 삼차원 공간에 새로운 형태의 구조-파괴된 기둥과 균열된 벽-를 이식해 놓거나 특수한 사물들-도자기, 동전, 농구공, 금관악기, 주전자 등-을 배치하는 등 최소한의 조각적 개입을 시도해왔다. 20세기 이후, 현대의 많은 작가들이 “형태”와 “공간”의 상관성을 집요하게 탐색했던 것처럼, 허산은 침묵하듯 텅 빈 현실의 공간을 증명하기 위해 조각적 형태들을 공간 속에 흩어놓았다. 이처럼 그는 조각적 간섭을 통해, 재현 불가능한 삼차원 공간에 대한 신체적인 지각의 가능성을 모색한다. 그의 연작과 연작을 볼 때, 작가는 현실 세계의 경계를 봉인하고 있는 스크린에 일부러 균열을 일으킨다. 그는 텅 빈 공간을 가로질러 불필요한 기둥을 새로 구축하고, 공간을 지탱하고 있던 견고한 기둥에 돌이킬 수 없는 균열을 내며, 편평한 하얀 벽에 깊숙한 구멍을 낸다. 그의 조각적 간섭 행위는, 완벽하게 숨겨왔던 비가시적 공간을 폭로하고 그것을 신체적으로 경험할 것을 제안한다.

  한편 그것은 또한 일상의 평범한 공간에 일어난 특수한 사건의 단초를 제공하면서 매우 극적인 상황을 연출하기도 한다. 고유한 역사·전통·문화·사회적 상징물들이 본래의 장소에서 떨어져 나와 낯선 상황 속에 서툴게 이식된 후, 끊임없이 공간 속에서 되살아날 때의 초현실적 경험은 사실 뭐라 설명하기조차 어렵다. 그런 식으로 공간에 연루된 조각적 형태들은 공간에 대한 신체적 경험을 가능하게 할 뿐 아니라, 어떠한 사건의 복선 내지 결말처럼 수수께끼 같은 기억의 메커니즘을 작동시키기도 한다. 이는 부서지고 파묻힌 물건의 잔재가 바로 발견된 오브제의 분열적이고 이중적인 표상을 환기시키고 있음을 말해준다. 허산의 작업 중에서 건축물 내벽에 구멍이나 균열을 낸 후 그 속에 특정한 사물을 삽입해 넣은 (2006), (2011, 2013)를 보자. 그가 과거의 기억과 경험에 근거해 발견해낸 사물들은 이미 그 본래의 상징적 권위와 정체성을 대부분 상실했다. 이렇게 수집된 사물들은 그의 설명대로, 현실의 건축적 공간에 파고들어 주변 환경과 교감하는 조각적 형태로 복권된다. 이는 또한 허산의 작업 전반에서 볼 수 있는 “건축적 공간”에 대한 역설적 태도와 그 공간에 대한 치밀한 “조각적 개입”의 시나리오를 추측하게 한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구축한 섬세한 시각적 장치들을 통해 “공간”을 둘러싼 동시대 미술의 거대 담론을 매우 유연하게 다룬다. 

MARIUS GRAINGER


   Shan Hur’s sculptural interventions disrupt the viewer’s perception of the white cube as an art container, directly implicating the gallery space as an active element in the artwork itself. The ideas which inform his practice derive from a careful examination of construction sites and closed shops, fascinated by the moment of transition when a particular space is reconfigured for a new purpose. During this transition the polished veneer of the city is temporarily removed, thereby exposing its farcical nature, and the mechanisms by which this veneer is generated.

Shan Hur exposes and plays with the facade of the exhibition space, transforming it into a site of discovery. Rather than the passive role in which the viewer traditionally receives sculpture within the context of the gallery, here he becomes an active participant, in what seems to be an excavation. Though the participatory aspects of Hur’s work are mental rather than physical, they uncage an inquisitive imagination, evoking memories of the adventures and discoveries made during childhood. 


Shan Hur
from artist's note


   When I see closed shops or construction sites in the city I look at them carefully. You can easily find these scenes.
They are vague and attractive because the space used to be different - it is being changed into something new.
Walking through the debris I have feelings that are neither positive or negative because certain things have already
happened and are progressing in a certain direction. Such scenes interest me as they temporarily sidestep into
silence and incompleteness. I like the way something is revealed in this gap. 

   Sculptures bigger than human scale seem to be exaggerated. One of the issues I have focussed on is how to reduce   
the burden of the volume of sculpture. I then connect this mass to it's surroundings, but not just as a part of the whole.

   I think sculpture should communicate with it's circumstan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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